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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자스님

2024-07-31

          문득 삐가 동행과 함께 절에 왔다. 삐는 전 스님이 계신 당시에는 자주 절에 와서 절일을 돌봤다고 한다. 오가다 절에 들러 작은 텃밭도 일구고 공양도 더러 올리는 등, 스님 시봉을 잘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 온 뒤엔 안했다. 전 스님한텐 했다면서 왜 나한테는 안하냐고 짐짓 물었더니, 답을 안했다. 올구에게 얘기했더니 남자스님은 아무래도 살림에 서툴고 여자스님은 알아서 잘 하실거라서가 아닐까요, 했다.! 여자스님이란 말을 여기와서 첨 듣는다. 비구니, 비구 라는 단어를 모르고 분간도 못한다. 그래서 여자스님, 남자스님 그런다. 무슨 말씀, 살림은 비구나 비구니나 다 할줄 안다. 절에서 다 해야하기 때문이다. 비구니가 대접을 못받는 건, 특히 여자들에게 못받는 건, 여기나 저기나 같다. 속세의 이치로 보자면, 여자가 비구 챙기면 남자는 비구니를 챙겨야 공평할 거 같은데 절간에는 그런 거 없다. 한마디로 모두가 비구니를 비구보다 못하다 여기고 속으로 깔본다. 출가를 후회한 적이 딱 한 번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이다. 암튼, 공양하러 온 건 아닐테고 무슨 일로 평일에 왔나 했더니, 동행의 아들이 감옥에 있는데, 내가 상담을 해줄 수 있나 물으러 왔다. 나는 일단 당자에게 물어봤냐 한다. 안물어봤다 한다. 물어보고 다시 오라고 한다. 차를 주고, 미국에서 이민자 자녀를 키우며, 차별과 수많은 장애에 적응하는 어려움에 대해 많은 얘길 듣는다. 삐는 '왕년의 내가' 과다. 여기 사람들은 다 왕년에 산다. 세탁소를 해도, 호텔 청소, 핸디맨을 하고 있어도, 그게 생업이어도, 그건 직업이 아니다. 자긴 현재 여기선 비록 '이런일' 하고 있지만 '그런 사람'이 아니다. 집안도 모두 다 좋고 학교도 다 좋은데 나왔다. 확인할 길이 없다. 뭐 굳이 확인할 일도 아니다. 아무튼, 현재와 과거, 진실과 허상, 한국과 미국간의 괴리감 속에 갇힌 채, 균열된 현재를 살고 있다. 삐도 역시 그런 사람이다. 삐는 스님과 늘 심정적으로 맞서고, 좀 나무라면, 그 다음주 법회엔 안왔다. 그걸 알고, 일터에 도시락을 사들고 찾아가, 삼고초려한 끝에 절에 계속 나오게 만들었다. 한국에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잔소리를 도움말로 바꾸어 들을 날이 올 것을 기다린다. 처음부터 나는 삐가 어느 절에나 한 명 쯤은 있는, 절일을 내 일처럼 하는 보살이 되어줬음 했었다. 올구 같이 주인행세 말고, 불자의 자세로. 전 스님 있을 땐 보살행를 잘했다 해서 이기도 하고, 말귀가 그나마 있어서이다. 하지만 이이는 이때도, 후에도 끝내 그런 사람이 되진 않는다. 신상에 무슨 일 생기면 제일 먼저 절을 버렸다. 동행과 더불어 이런저런 얘기 끝에 영화사 현 재정 상태를 들은 삐가 스스로 자기도 다달이 집세를 보태겠다 한다. 운영비 턱없이 부족하던 차에, 뜻밖에 반갑다. 보시는 당연히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지만, 이곳 형편상 어찌됐든 집세는 죽어도 내야 해서, 다달이 정액보시를 하는 이가 진정 필요하다. 하지만 이들은 종단에서 스님한테 돈을 주는줄 안다. 그래서 절의 생존 여부에 무심하다. 한국 절에선 평생 소임자가 아닌 이상은, 절 살림살이나 재정상태를 걱정하며 살 일이 없기 때문에, 갑자기 미국에 와서 집세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돈 잊고 산 스님들은 저으기 당황스러울 것이다. 이사, 라는 명목하에 그들이 '보시' '하는' 것이 아닌 '돈'을 '주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표면으로 적나나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정신차리지 않으면 스님이 까딱 그들의 시종을 살기 딱 좋은 형상이다. 법문하는 입장이 아니면, 그까이 시종 얼마든지 살아도 좋다. 그러나 대중 시종은 대중을 가르칠 수 없다. 중은 위의이다. 위의가 서지 않으면 부처님 법은 없다. 사람은 자기가 돈을 주는 사람은 막 보는 습성이 대부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사회비를 내가 받는게 아니라고 여러번 귀에 못을 박는다. 당연한 사실임에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돈을 주던' 이들을 '보시하는' 이들로 바꾸는데 오래 걸릴 것을 알아, 삐에게 차를 주는 마음이 다시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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