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가 갑자기 왔다. 칠구네 집에서 식사초대가 있는데 가도 되냐고 한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스님도 올구도 모르게 너만 오라, 한 것이 걸려서라고 한다. 삐는 늘 계산적이라 그 복을 감하고 사는 부류다. 나는 이미 이 일이 일어날 걸 알고 있다. 칠구는 원래 영화사 신도였는데 전 스님이 가고 안계시는 동안 베이에 있는 절에 나가게 됐다, 근데 가까운 곳에 스님도 오셨으니, 다시 영화사에 다니고 싶은데 어쩌면 좋으냐, 내가 온 직후에 물으러 왔었다. 여기서는 한 신도가 일당백 노릇을 하더라, 보살님이 그 스님도 얼마나 귀하겠나, 그 절에 그냥 가라, 하고 보냈었다. 지금은 영화사의 신도가 되어 있지만, 그 절이 문 닫기 전까지 한동안은 아니었다. 암튼 그 모임에서 일련의 몇 시비자들이 모여 올구만 버리고 영화사 신도를 다른 절로 옮기는 방법을 논의하였다. 삐를 부른 건 영화사 신도를 움직이게 하려던 의도다. 그 절이란 지난 초파일에 온 이상한 거사가 돈을 댔다는! 그 집이다. 그 며칠 후 나는 칠구에게 전화 한다. 착한 너가 영화사 오겠다는 거 애써 보낸 이유는, 시비거리 만들걸 알아서다, 다시 이런 시비 자리 만들면 그땐 가만 있지 않겠다, 난 다른 스님네들 처럼 순하지 않다, 한다. 칠구는 자기는 그들이 그런? 얘길 한줄도 모르며, 그냥 점심 먹는 장소만 제공했을 뿐, 이라며 억울하다 한다. 모르고 행했어도 동업이다, 해준다. 이곳엔 '보살절' 문화가 있다. 초파일의 남자가 '비구닐 데려다' 운운 했던 식으로, 렌트, 혹은 자신 소유의 집에, 세속일 모르는 중을 '데려'오고, 자신이 오너가 돼서 절과 중을 좌지우지 하는 형식이다. 스님을 서포트해서 번듯한 절로 탈바꿈하도록 불사를 한다든가 깨달음을 얻겠다든가 보다는, 일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 오는 스님들은 당연히 초대한 보살이 그 절을 보시한 걸로 알고 온다. 절을 사유로 생각하는 스님은 없다. 전 스님이, 올구는 '비지니스 절'을 하는 사람이다, 했을 때, 무슨 말인지 몰랐었는데, 이것이 그것이다. 이들이 그렇게 된 연유에는 이곳 불교 역사 속에 초대 사이비가 있다. 들은 바 그는, 중은 그냥 거지다, 떠받들 이유 없다, 우리가 절 주인이고 운영자다, 중은 데려다 간판 시키면 된다, 라고 가르친 작자이다. 이곳 법엔 시민권자가 아니면 종교 라이센스를 내주지 않게 되어있다. 그래서 스님이 직접 절을 열더라도, 현지인 후견인을 앞세우게 되는데, 이런 경우도 그들은 자신이 집주인이라 여기게 된다. 애초 무슨 근거로 그렇게 가르친 건지 그 자를 찾아 추적한 결과, 늙지도 않았는데 이미 죽고 없단 걸 알게 된다. 그가 시작한 오류를 그가 정정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심하다가, 이 '절장사' 하는 이들의 정화가 우선 돼야 불교가 서고, 그러기 위해선 그릇된 역사만큼의 정화의 시간이 필요하단 답이 나온다. 이것이 내 업이다. 난 조용한 싸움꾼이다. 삼 년의 와신상담의 시간을 갖기로 결정한다. 이곳 종교법엔 불교에 대한 설티프케이트가 따로 없다. '처치'로 뭉뜽거려져 있는 그 법은 특히, 스님의 수행처와 상주, 논리를 이해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스님들은 어차피 다 버리고 출가한 이들이라, 뭐든 따지는 일을 지독히도 못한다. 해서, 자칭 오너와 신도들의 자질에 따라, 그 삶이 우아하게도, 우습게도 취급될 수 있고, 본인만 모르는, 무소유의, 무보수의, 절 지키는, 일꾼, 자원봉사자...등으로 매김 된다. 스님들은 불자 아닌 속인을 모른다. 미국을 몰라, 화주보살의 말에 따라 살다보면, 어느순간 주객이 전도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마침내, 뭔가 이상함을 깨닫게 되면, 이건 아니다, 하고 미련없이 떠난다. 슬프게도, 속고, 욕먹고, 배곯고, 병든 채 간다. 절 시절인연이 이렇게 척박한 상황이고 보니, 나는 알아도, 틀렸다 못하고, 절법이 바로 설 때까지, 절장사 하는 이가 승속의 법을 바로 알 때까지, 속 뜻을 감추고, 집지키는 순한 개처럼 보이며 살자, 한다. 되도록 재빨리 떠나는 게 상책이나, 나는 이대로 갈 수는 없다, 한다. 과보는 부처님이 반드시 하실 것임을 이미 안다.